거인은 언제나 예상 밖의 자리에서 태어났다
온체인 세계의 다음 거인은 어디에서 나올까. 아마존은 온라인 서점으로 시작했지만 진짜 제국은 AWS라는 클라우드 인프라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구글은 검색 엔진으로 유명해졌지만 실제 돈은 애드워즈라는 광고 경매 모델에서 나왔습니다. 두 사례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본 ‘앞단 서비스’가 아니라, 그 서비스를 굴리며 우연히 생긴 ‘뒷단 인프라’가 진짜 통행료 징수소가 됐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틀로 온체인 세계의 세 개 레이어 — 스테이블코인, L1 체인, 예측시장 — 를 하나씩 뜯어봤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셋을 나란히 놓고, 다음 거인이 어디서 나올 가능성이 큰지 종합해봅니다.
레이어 1 — 스테이블코인, 화폐 자체를 통행료로 만들다
테더는 2025년 순이익 100억 달러를 넘겼고, 준비금으로 미국 국채 1,410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수익 구조는 단순합니다. USDT 보유자에게는 이자를 주지 않으면서, 그 준비금이 벌어들이는 이자는 전부 가져갑니다. 은행이 예금자에게 낮은 금리를 주고 차익을 취하는 구조와 같습니다. 게다가 러시아 최대 은행이 USDT를 대출 담보로 인정하고, 아르헨티나·튀르키예 같은 나라에서 실물경제 결제 수단으로 쓰이는 사례까지 나오면서, 크립토 거래 수단을 넘어 신흥국의 ‘사실상 디지털 달러’ 역할까지 넘보고 있습니다. 다만 준비금 일부가 금·비트코인처럼 변동성 자산으로 구성돼 있어 S&P로부터 안정성 최하위 등급을 받는 등, AWS에는 없는 ‘준비금 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레이어 2 — L1, 온체인의 운영체제 자리
이더리움은 TVL 556억 달러로 전체 디파이의 68%를 차지하며 기관 자금의 압도적 선택지입니다. 블랙록, 프랭클린 템플턴 같은 기관들이 여전히 이더리움을 선호합니다. 반면 솔라나는 TVL은 훨씬 작지만 개발자 수가 연간 83% 늘고, 실제 거래량은 이더리움을 앞지릅니다. 이 구도는 컴퓨터 산업의 오래된 논쟁 — 안정성 중심의 서버(이더리움)와 속도·비용 중심의 개인용 기기(솔라나) — 를 그대로 재현합니다. 승자독식이 아니라 역할 분담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큰 레이어입니다.
레이어 3 — 예측시장, 아예 새로운 카테고리에서 태어나는 거인
가장 흥미로운 레이어입니다. 폴리마켓과 칼시는 “누가 선거에서 이길까”를 맞히던 베팅 플랫폼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영구선물·마진거래·금속·외환·에너지로 상품군을 넓히며 스스로를 “차세대 리테일 파생상품의 새로운 유통 레이어”로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2026년 1분기 온체인 예측시장 거래량은 360억 달러로, 역사상 처음 전통 온체인 도박 거래량을 넘어섰습니다. 메타마스크 지갑에 예측시장 기능이 내장되고, AI 에이전트가 이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거래를 시작했다는 보고까지 나오는 걸 보면, 이건 아마존이 서점이라는 기존 카테고리가 아니라 클라우드라는 완전히 새로운 카테고리에서 거인이 됐던 패턴과 가장 닮아 있습니다.
세 레이어를 관통하는 하나의 패턴
세 레이어를 나란히 놓고 보면, 겉보기엔 전혀 다른 시장인데도 똑같은 구조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규제를 받아들이며 기관·제도권 자금을 노리는 축(서클의 USDC, 이더리움, 칼시)과, 허가 없이 전 세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탈중앙 축(테더의 오프쇼어 USDT, 솔라나의 빠른 실행 환경, 폴리마켓의 온체인 정산)이 매 레이어마다 나란히 공존하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온체인 세계 전체가 아직 “제도권 안”과 “제도권 밖” 중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지 않은 채 양쪽 다 커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거인은 어디서 나올까
역사가 주는 힌트는, 진짜 최종 승자는 한 레이어만 지배하는 회사가 아니라 여러 레이어를 동시에 엮어내는 회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아마존은 소매·물류·클라우드를 하나로 엮었고, 구글은 검색·광고·안드로이드를 하나로 엮었습니다. 온체인 세계에서도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자체 결제 인프라를 만들거나, 거래소가 자체 L1을 만들거나(하이퍼리퀴드가 이미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예측시장이 자체 스테이블코인과 결제 레일을 갖추는 식으로 레이어 간 경계가 무너지는 회사가 결국 가장 큰 승자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치며
2000년대 초, 아마존은 서점이었고 구글은 검색창이었습니다. 그 이면에서 조용히 자라던 AWS와 애드워즈를 알아본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온체인 세계도 비슷한 지점에 서 있는지 모릅니다. 스테이블코인의 준비금 수익, L1의 실행 수수료, 예측시장의 새로운 유통 레이어 — 이 중 어느 것이, 혹은 이들의 결합이 다음 10년의 AWS가 될지는 아직 아무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답은 지금 가장 화려해 보이는 곳이 아니라, 가장 조용히 통행료를 걷고 있는 곳에서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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