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선약수 — 달러는 다투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른다

노자 도덕경 8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핵심입니다. “수선리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처중인지소오(處眾人之所惡).”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꺼리는 낮은 곳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앞서 다룬 스테이블코인 달러화 현상 — 아르헨티나 페소 거래의 94.3%가 스테이블코인이고, 나이지리아 성인의 40%가 암호화폐를 쓰는 현실 — 을 다시 들여다보면, 이 2,500년 전 구절이 놀랍도록 정확한 묘사가 됩니다.

달러는 명령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강제성의 부재입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국민에게 스테이블코인을 쓰라고 명령한 적은 없습니다. 미국이 나이지리아에 달러 토큰을 강요한 적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자국 통화가 급격히 가치를 잃는 걸 지켜보다가, 스스로 스테이블코인을 선택했습니다. 이게 과거의 통화 패권과 다른 지점입니다. 식민지 시대의 화폐 강제는 총과 법으로 이뤄졌지만, 지금의 스테이블코인 확산은 순전히 자발적 선택의 누적입니다. 물이 누구에게도 명령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가장 낮은 곳을 찾아가듯, 달러도 강제 없이 가장 필요한 곳을 찾아갑니다.

낮은 곳 — 사람들이 꺼리는 자리
“처중인지소오” — 사람들이 꺼리는 곳에 머문다는 구절도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안정된 통화를 가진 나라(일본 엔은 스테이블코인 거래 비중이 0.3%에 불과합니다)에서는 아무도 이 흐름에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튀르키예처럼 통화 가치가 흔들리는, 다른 자본이라면 굳이 찾아가지 않을 위험한 저지대에 이 흐름이 가장 먼저, 가장 깊게 고입니다. 물이 사람들이 꺼리는 낮은 곳에 고이듯, 달러 유동성도 다른 통화가 감당 못 하는 가장 취약한 지점을 채웁니다.

다투지 않기에 결국 이긴다
도덕경 68장에는 “부쟁이선승(不爭而善勝)” — 다투지 않기에 오히려 잘 이긴다 — 는 구절도 있습니다. 달러가 각국 중앙은행과 정면으로 통화전쟁을 벌였다면 오히려 거센 반발과 규제로 막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은 국가 대 국가의 싸움이 아니라, 개인들의 조용한 선택이 하나씩 쌓이는 방식으로 퍼졌습니다. 누구와도 다투지 않았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 수 있었습니다.

흐름의 순수함에는 한계도 있다
다만 이 비유를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물은 의도가 없지만, 이 흐름 뒤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앞서 짚었듯 베센트 재무장관은 스테이블코인을 미국 국채 수요 확대의 명시적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처럼 보이는 이 현상의 일부는, 사실 미국이라는 상류에서 의도적으로 수문을 열어둔 결과이기도 합니다. 노자의 물은 계산하지 않지만, 이 물길의 상류에는 계산하는 손이 분명히 있습니다.

마치며
그럼에도 이 비유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정작 강물이 흘러가는 그 순간에는 아래쪽 사람들에게 강제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은퇴자는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스스로 스테이블코인을 선택합니다. 상류의 의도와 하류의 자발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물길이, 지금 달러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진짜 방식입니다.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북마크해두세요. Web3와 크립토의 핵심 개념들을 쉽게 설명하는 글을 계속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