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저항성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이 처음부터 내세워온 핵심 가치입니다. 어떤 거래도 누군가의 판단으로 블록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입니다. 그런데 최근 여러 체인의 움직임을 들여다보면, 이 이상이 현실의 기술적·경제적 제약과 부딪히는 지점이 저마다 다르게 드러납니다. 이더리움·비트코인·솔라나, 이더리움 위의 레이어2인 아비트럼, 그리고 애초에 다른 설계 철학을 택한 아발란체까지, 다섯 층위에서 팩트를 기준으로 짚어보겠습니다.
이더리움 — 문제를 인정하고 구조로 풀려는 시도
2022년 8월 OFAC의 토네이도캐시 제재 이후, 이더리움에서는 실제로 검열이 벌어졌습니다. 2023년 3월 기준 신규 블록의 약 30%가 OFAC 제재를 준수했고, 직전달엔 그 비율이 최대 50%에 달했습니다. 원인은 구조적입니다. 2023년 10월부터 2024년 3월 사이, 단 3개의 블록 빌더가 전체 MEV-Boost 블록의 약 80%를 만들어냈습니다. 소수 빌더에 의존하는 구조 자체가 검열의 취약점이었던 셈입니다. 이더리움은 이 문제를 프로토콜 차원에서 풀려고 합니다. FOCIL(EIP-7805)은 16명의 무작위 검증자 위원회가 멤풀의 유효 거래를 ‘포함 목록’으로 강제 지정하고, 블록 제안자가 이를 빠뜨리면 블록 자체가 거부되도록 하는 설계입니다. 2026년 후반 예정된 업그레이드에 포함될 전망이지만, 아직 초안 단계입니다.
비트코인 — 이상은 강하지만 현실은 반복된다
비트코인에서는 채굴풀 집중도 자체가 검열 위험입니다. 2023년 11월, 3위 채굴풀 F2Pool이 제재 대상 거래 6건 중 4건을 필터링한 사실이 드러났고, 커뮤니티 반발로 필터링을 중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2024년 12월 연구에 따르면 F2Pool이 검열을 재개한 정황이 다시 포착됐습니다. 2026년 현재는 Foundry USA(25.5%)와 AntPool(19.2%) 두 풀이 전체 블록의 약 44.6%를 생산하고 있고, AntPool 계열사가 여러 풀의 블록 템플릿을 실질적으로 중앙 구성하는 구조까지 감안하면 실제 통합 점유율은 37~50%로 추정됩니다. 비트코인은 이더리움처럼 프로토콜 차원의 강제 장치보다는, 커뮤니티 압박과 채굴 프로토콜 개선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솔라나 — 검열이 아닌 조작의 문제로 재정의
솔라나는 검열저항성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단일 검증자가 거래 순서를 조작할 수 있는 구조적 문제로 접근합니다. ‘Constellation’ 업그레이드는 다중 제안자가 동시에 거래 배치를 제출하고, 별도의 증명자가 이를 검증·기록하는 구조로 전환합니다. 약 50밀리초 간격의 고정된 포함 시간을 보장해, 경쟁력 있는 가격의 유효 거래는 정해진 시간 내 반드시 포함되도록 설계했습니다. 이더리움 FOCIL이 ‘위원회의 강제 포함’이라면, 솔라나는 ‘MEV 발생 조건 자체를 제거’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아비트럼 —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사례
아비트럼의 시퀀서는 현재 중앙화되어 있습니다. 검열 시 사용자는 이더리움을 통한 ‘강제 포함’ 기능으로 우회할 수 있지만, 기본 대기 시간만 24시간이고 최악의 경우 최대 50일까지 지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 기술적 장치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개입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켈프 해킹으로 유출된 이더리움 3만 766개(약 7,120만 달러)를, 12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9명의 찬성으로 동결한 것입니다. 이 조치를 둘러싸고 “소수 위원회가 명령만으로 자금을 통제할 수 있다면 탈중앙 네트워크라 할 수 있느냐”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검열을 막는 기술적 장치는 갖춰져 있지만, 자금을 동결할 권한은 여전히 소수에게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입니다.
아발란체 — 검열저항성을 애초에 옵션으로 설계하다
아발란체는 앞의 네 사례와 결이 다릅니다. 탈중앙화를 약속했다가 현실에서 무너지는 패턴이 아니라, 처음부터 검열저항성의 수준을 선택 가능한 옵션으로 설계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아발란체의 서브넷(현재는 ‘L1’으로 불립니다) 구조에서는 각 체인이 검증자 구성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데, 메인넷 기준 권장 최소 검증자 수는 단 5개입니다. 이더리움이나 비트코인의 검증자·채굴자 규모와 비교하면 현저히 적은 숫자입니다. 더 나아가 완전히 허가형(permissioned)으로 설계해 사실상 단일 운영자가 통제하는 서브넷도 구조적으로 가능합니다. 최근 아발란체 관련 소식은 애니모카의 아바랩스 투자, Aave의 아발란체 RWA 허브 연동 제안 등 기관 자금과 실물자산 유입 쪽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즉 아발란체는 탈중앙화된 검열저항성보다 기업·기관이 원하는 속도와 통제력을 우선하는 체인들을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이는 “검열저항성은 기본값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사양”이라는, 앞의 네 사례와는 또 다른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상에 가까워지는 길, 저마다 다르다
다섯 사례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완벽한 검열저항성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더리움은 프로토콜 규칙으로, 비트코인은 커뮤니티 압박으로, 솔라나는 설계 자체의 재구성으로, 아비트럼은 기술적 안전장치와 거버넌스 개입 사이의 긴장으로 각자의 방식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반면 아발란체는 그 이상 자체를 타협 가능한 선택지로 재정의합니다. 결국 이상에 얼마나 가까워질 것인가와, 해킹·소수 집중·제재·그리고 속도와 통제력 같은 현실적 요구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사이에서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타협 중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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