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안은 멈췄지만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미국 가상자산 시장구조법 클래리티 법안(CLARITY Act)은 2025년 7월 하원을 294 대 134라는 초당적 찬성으로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상원에서 발이 묶였습니다. 스테이블코인 수익 처리 방식, 자금세탁방지 집행 수단 같은 쟁점을 두고 100건 넘는 수정안이 오갔고, 2026년 8월 휴회 전 표결 목표는 9월로 밀렸습니다. 최근 분석 기관들은 통과 확률을 31% 수준으로 낮춰 잡고 있습니다. 정치적 교착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미 시행되고 있다
흥미로운 건 그 사이 SEC와 CFTC가 법안의 핵심 내용을 자신들의 기존 권한 안에서 먼저 구현해왔다는 점입니다. 2026년 3월 11일 두 기관은 양해각서(MOU)를 맺고 “최소 유효 규제”라는 원칙 아래 협력 체계를 갖췄습니다. 일주일 뒤인 3월 17일에는 공동으로 해석 지침을 발표해, 비트코인·이더리움·XRP를 포함한 16~18개 암호자산을 CFTC 관할의 ‘디지털 상품’으로 명시했습니다. 클래리티 법안이 입법으로 하려던 자산 분류 작업을, 법이 없어도 기관 해석만으로 사실상 먼저 해버린 셈입니다.
개별 사례들도 쌓이고 있다
이 흐름은 추상적 선언에 그치지 않습니다. CFTC는 2026년 3월 팬텀(Phantom) 지갑에 무조치 서한을 발급해, 일정 조건만 지키면 중개업자 등록 없이도 파생상품 접근을 중개할 수 있다고 확인해줬습니다. 2월에는 국법은행이 결제형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될 수 있다는 서한을 재발급했고, 2025년 12월에는 선물중개업자(FCM)가 디지털자산을 증거금으로 인정할 수 있는 길도 열어줬습니다. SEC는 별도로 토큰 세이프하버 프레임워크(4년간 500만 달러 면제)를 독자적으로 추진 중입니다. 하나하나는 작은 행정 조치지만, 모아놓고 보면 법안이 하려던 일의 상당 부분이 이미 실무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우회가 가능한가
이유는 단순합니다. SEC와 CFTC는 이미 갖고 있는 권한(해석 지침, 무조치 서한, 면제 조치) 안에서도 상당한 재량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의회는 초당적 합의가 있어야 움직입니다. 스테이블코인 수익을 누가 어떻게 과세할지, DeFi 프로토콜의 개발자·인터페이스에 어디까지 책임을 물을지 같은 쟁점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이런 문제에서는 합의가 느립니다. 반면 “이 자산은 증권이 아니라 상품이다”처럼 기존 법 해석의 영역에 있는 문제는 기관 스스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정치적으로 뜨거운 부분은 의회에 막혀 있고, 행정적으로 처리 가능한 부분은 이미 상당히 진행됐다는 그림입니다.
이 우회가 갖는 한계
다만 이 방식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행정 지침과 무조치 서한은 다음 정권이나 다음 위원장이 바뀌면 언제든 뒤집힐 수 있습니다. 법으로 못박힌 게 아니라 재량으로 허용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클래리티 법안이 다루려던 DeFi 책임 소재, 포괄적 집행 체계 같은 부분은 개별 행정조치로는 완전히 대체되지 않습니다. 즉 지금의 우회는 시장이 숨 쉴 틈을 만들어주는 임시 다리이지, 법안을 대신하는 영구적 해법은 아닙니다.
마치며
온체인 시장은 입법 일정표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정치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동안에도, 기존 권한을 쥔 기관들은 자신의 재량 안에서 계속 규칙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클래리티 법안이 통과되든 실패하든, 이미 만들어진 이 실무 기반 위에서 시장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그 기반이 법률만큼 단단하지는 않다는 점은 함께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북마크해두세요. Web3와 크립토의 핵심 개념들을 쉽게 설명하는 글을 계속 업로드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