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커스터디가 온체인 세계에서 왜 중요한지 다뤘는데, 지금 이 시장을 실제로 들여다보면 국내외 은행들이 상당히 치열하게 자리 선점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이 경쟁을 “코인 금고” 선점 싸움이라 표현했는데, 실제로 최근 몇 달 사이 이 시장에 뛰어드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습니다.
글로벌 시장의 세 진영
커스터디 시장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뉩니다. 첫째는 파이어블록스처럼 자체 라이선스보다는 기술 인프라 자체를 파는 회사입니다. 둘째는 앵커리지디지털처럼 아예 미국 연방 인가를 받은 가상자산 은행입니다. 앵커리지는 미국 통화감독청(OCC) 인가를 받은 최초의 연방 가상자산 은행이라는 지위를 갖고 있고, 최근에는 스테이블코인 프로토콜 프그먼트와 손잡고 기관용 온체인 금융 서비스까지 확장하고 있습니다. 비트고 역시 비슷한 길을 걸어, 자체 은행·신탁 라이선스(비트고뱅크앤드트러스트)를 갖추고 최근에는 이더리움 스테이킹까지 지원하는 수탁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셋째는 BNY멜론처럼 뒤늦게 뛰어든 전통 은행입니다. BNY멜론은 최근 디지털자산 금융회사 갤럭시와 손잡고 자사 커스터디 플랫폼에 스테이킹 기능을 얹어, 보관과 수익 창출을 한 플랫폼에서 처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피델리티도 자사 이더리움 현물 ETF에 스테이킹을 도입하기 위해 앵커리지디지털뱅크와 비트고뱅크앤드트러스트를 수탁사로 추가했습니다.
한국 시장의 구도
국내에서는 글로벌 기술기업과 국내 금융지주가 짝을 짓는 방식으로 판이 짜이고 있습니다. 비트고코리아는 비트고와 하나금융그룹(약 25% 지분), SK텔레콤이 공동 설립한 법인으로, 최근 금융정보분석원(FIU)의 가상자산사업자 신고 수리를 마치고 국내 기관·법인 대상 수탁사업을 본격화했습니다. 인피닛블록은 Sh수협은행과 iM뱅크가 각각 약 15%씩 투자해 공동 2대 주주로 올라섰습니다. 카카오페이·카카오뱅크와 손잡은 비댁스는 파이어블록스를 기술 파트너로 선정해 멀티체인 운영 역량을 강화했습니다. 시중은행에 이어 지방은행과 특수은행까지 이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는 게 지금 국내 시장의 특징입니다.
경쟁의 진짜 축은 ‘누가 더 안전한가’가 아니다
이 경쟁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보안 수준을 겨루는 싸움이 아니라는 게 드러납니다. 실질적인 차별점은 오히려 이런 것들입니다. 자체 은행·신탁 라이선스를 보유했는가(앵커리지, 비트고), 아니면 순수 기술만 제공하는가(파이어블록스). 커스터디 하나만 제공하는가, 아니면 스테이킹·세금·공시 서비스까지 한 플랫폼에 묶어 제공하는가(BNY멜론·갤럭시 모델). 그리고 국내 시장에서는 어떤 금융지주와 손잡았는가가 사실상 시장 접근권 자체를 결정합니다. 금융계 관계자들이 “경쟁사에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다고 언급한 것도, 이 라이선스와 파트너십 선점이 나중에 뒤집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수요는 이미 예고되어 있다
이 경쟁이 지금 뜨거워지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국내에 비트코인 현물 ETF가 도입되면 자산운용사를 대신해 기초자산을 보관할 전문 수탁사가 필요하고,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되면 지갑 관리와 결제·정산 과정에서도 커스터디 인프라가 그대로 쓰이게 됩니다. 규제가 아직 완비되지 않았을 뿐, 규제가 열리는 순간 곧바로 서비스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압박이 지금의 투자 경쟁을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며
카카오그룹이 파이어블록스를 택한 것도 이런 지형 안에서 봐야 합니다. 자체 은행 라이선스를 새로 따내는 대신, 이미 200개 넘는 체인과 2,500곳 넘는 기관 신뢰를 쌓아둔 기술 파트너와 손잡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결국 이 시장의 경쟁은 “누가 금고를 더 튼튼하게 짓는가”보다 “누가 더 빨리, 더 넓은 자산을 담을 수 있는 금고와 손을 잡는가”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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