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들은 늘 예상 밖의 사업에서 태어났다
아마존은 온라인 서점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마존의 영업이익 상당 부분을 만들어내는 건 서점이 아니라 AWS, 즉 클라우드 인프라 사업입니다. 아마존이 자기 내부 시스템을 관리하려고 만든 기술을, 다른 기업들에게 빌려주는 사업으로 전환한 것이 2006년입니다. 그전까지는 아무도 “책 파는 회사가 서버를 빌려준다”는 그림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구글도 비슷한 궤적을 그렸습니다. 검색 엔진 자체는 뛰어났지만, 구글을 정말 거대한 기업으로 만든 건 애드워즈라는 경매 기반 광고 모델이었습니다. “공짜로 제공되는 서비스” 뒤에서 실제 돈이 어떻게 도는지를 찾아낸 것이 결정타였습니다.
두 사례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눈에 띄는 앞단 서비스(온라인 서점, 검색창)가 아니라, 그 서비스를 운영하며 우연히 만들어진 뒷단 인프라가 진짜 제국이 됐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인프라는 다른 모든 사업자가 그 위에서 무언가를 짓고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통행료 징수소 역할을 했습니다. 이 틀을 지금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 대입해보면, 흥미로운 유사성과 함께 결정적인 차이도 드러납니다.
테더라는 숫자로 보는 규모
테더는 2025년 한 해 순이익 100억 달러를 넘겼습니다. 유통 중인 USDT는 1,840억 달러 규모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준비금 중 최대 1,410억 달러가 미국 국채입니다. 이 정도 규모면 테더는 이미 세계 최대 규모의 민간 미국 국채 보유 기관 중 하나입니다. 중견 국가의 외환보유고에 맞먹는 자산을, 스테이블코인 발행이라는 사업 하나로 굴리고 있는 셈입니다.
통행료 징수소의 전형적 구조
핵심은 수익 모델입니다. USDT 보유자에게는 이자가 한 푼도 붙지 않습니다. 그런데 테더는 그 준비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전부 자기 몫으로 가져갑니다. 은행이 예금자에게는 낮은 금리를 주고 그 예금으로 얻은 차익을 취하는 구조와 정확히 같습니다. “무료처럼 보이는 서비스 뒤에서 떠다니는 자금으로 돈을 번다”는 이 공식은 페이팔, 비자 같은 결제 인프라 기업들의 오래된 방식이기도 합니다. 아마존이 AWS로 “다들 필요하지만 아무도 직접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 인프라”를 팔았듯, 테더는 “다들 필요하지만 직접 발행하고 싶어하지 않는 디지털 달러”를 팔고 있습니다.
실물경제로 조용히 번지고 있다
최근 확인된 사례들이 이 유사성을 더 강하게 뒷받침합니다. 러시아 최대 은행 스베르방크가 9월부터 USDT를 대출 담보로 인정하기로 했고, 테더 CEO는 아르헨티나·튀르키예처럼 통화가 불안정한 국가에서 무역·결제에 USDT 의존도가 높다고 밝혔습니다. 크립토 트레이더의 결제 수단을 넘어, 자국 화폐가 불안한 나라들에서 사실상의 디지털 달러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AWS가 아마존 내부 필요에서 시작해 전 세계 인터넷의 밑바탕이 됐듯, 테더도 거래소 결제 수단에서 시작해 신흥국 실물경제의 인프라로 조용히 확장하는 중입니다.
아마존식 이원 전략의 재현
흥미롭게도 테더는 최근 이원 전략을 택했습니다. 기존 역외 USDT는 유지하면서, 앵커리지 디지털과 협력해 미국 GENIUS Act를 준수하는 별도 스테이블코인 USAT를 새로 출시했습니다. 반면 서클의 USDC는 처음부터 규제 순응을 앞세워 블랙록 BUIDL 같은 기관용 RWA 인프라의 결제 레이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아마존이 리테일(B2C)과 AWS(B2B)로 사업을 나눠 각각의 시장을 지배했듯, 스테이블코인 시장도 “역외·신흥국용”과 “역내·기관용”으로 갈라지는 이원 구조가 굳어지는 모양새입니다.
이 유사성이 흔들리는 지점
다만 반대 증거도 뚜렷합니다. 2026년 2분기, 테더는 영업이익 15억 달러(전 분기 대비 약 50% 증가)를 냈지만 동시에 초과 준비금 완충분이 82억 달러에서 41억 달러로 반토막 났습니다. 원인은 금과 비트코인 가격 하락이었습니다. 즉 준비금 일부가 순수 현금성 자산이 아니라 변동성 있는 자산으로 구성돼 있어, 크립토 시장이 흔들리면 테더 자신의 안전판도 함께 얇아집니다. S&P가 2025년 11월 테더에 안정성 최하위 등급을 매긴 이유도 정확히 이 지점이었습니다. AWS나 애드워즈에는 이런 종류의 ‘준비금 리스크’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클라우드 서버나 광고 경매는 그 자체로 가격이 출렁이는 자산을 담보로 돌아가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2026년 3월부터 KPMG의 전면 감사를 받기 시작해 오랜 투명성 논란은 상당 부분 해소했습니다.
규제 공백이 만든 성장의 창
여기서 한 가지 구조적 유사성이 더 있습니다. 아마존과 구글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은, 인터넷 상거래와 온라인 광고를 규율할 법 체계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규제가 뒤늦게 따라오는 동안, 두 회사는 사실상 무주공산에서 시장 구조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먼저 굳혀놨습니다. 스테이블코인도 비슷한 창을 지나고 있습니다. 앞서 다룬 대로 미국 클래리티 법안은 상원에서 표류 중이고, SEC·CFTC가 기존 권한으로 그 공백을 메우는 중입니다. 테더가 GENIUS Act 준수형 USAT를 미리 준비해두고, 서클이 상장과 함께 규제 순응 노선을 먼저 확립한 것도, 법이 완성되기 전에 시장의 기본 규칙을 스스로 써 내려가려는 움직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규제가 늦게 도착할수록, 먼저 자리 잡은 사업자에게 유리하게 판이 굳어진다는 인터넷 시대의 교훈이 여기서도 반복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짜 결정적 차이 — 플랫폼인가, 화폐인가
AWS의 진짜 위력은 그 위에서 넷플릭스, 에어비앤비 같은 완전히 다른 산업의 회사들이 자기 사업을 지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이 이 수준에 도달하려면, 단순한 디지털 달러 역할을 넘어 그 위에서 대출·보험·자산관리 같은 금융 상품들이 본격적으로 지어져야 합니다. RWA 토큰화와 디파이 대출 프로토콜들이 이미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 가설은 완전히 실현됐다기보다 실현되는 중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마치며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온체인의 아마존이 될 수 있다는 가설은, 규모와 통행료 구조만 놓고 보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그 인프라 위에 얼마나 다양한 산업이 실제로 지어지는가가 진짜 시험대입니다. 아마존이 서점에서 클라우드 제국으로 넘어가는 데 걸린 시간이 10년 가까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스테이블코인이 진짜 ‘플랫폼’이 되기까지도 아직 갈 길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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